신소의 사후, 뒷정리를 위해 그의 방을 정리하던 오지로가 서랍에서 작은 녹음기 하나를 발견함. 꽤나 아날로그적인 물건이었기에 오지로는 신소의 생전을 떠올리며 '안어울릴것 같은데 어울린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며 녹음기를 재생시킨다.
재생시켜보니 "안녕?" 라는 인삿말이 들려옴. 오지로는 당황해서 순간 녹음기를 멈췄다가 다시 재생시킨다.
"안녕하세요?"
뭐야 이건? 당황한 오지로는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봄.
"근처에 편의점이 어딨는지 알아?"
"성함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다양한 말들이 녹음되어 있음. 평범한 질문,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 비꼬며 조롱하는 말들도 있었음. 계속 듣고 있던 오지로는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깨달음. 전부 대답을 요구하는 말들을 녹음해둔 것이었음. 자신이 목소리를 잃어 무력해질 순간을 대비하여 신소가 녹음해둔 것이었음.
"아무 대답이나 좀 해봐."
이런 것까지 녹음해뒀어? 오지로는 푸스스 웃으며 녹음기를 껐다. 목소리 걱정할 시간에 목숨 아낄 방법이나 더 걱정하지 그랬어. 내면에서 무심코 떠오른 비난의 목소리에 오지로는 고개를 저었다.
신소는 사람을 구하고 죽었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죽었어. 나는 그 애를 비난하고 싶은게 아니라...
오지로는 다시 녹음기를 재생시켰음.
"대답좀 해보라니까."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 문득 오지로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이것들을 녹음하고 있었을 신소가 떠올라서 씁쓸해졌다. 그래서 대답했음.
"차라리 번호 가.."
차라리 번호 가르쳐 주실 수 있냐고 녹음하지 그랬어?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오지로의 기억이 거기서 끊겼다.
오지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느낀 건 이마가 아프다는 것이었음. 뭐지? 자신은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 왼손에는 편지가 한 장 들려있다.
-멍청이 오지로에게-
심술궂은 말투나 필체나, 누가봐도 신소가 쓴 편지였음.
편지의 내용은 여러번 수정했는지 지워진 부분이 많았음.
-반신반의로 녹음해 본건데 세뇌가 먹히더라고. 내 질문에 내가 대답했는데 나도 걸렸어.
-넌 설마 녹음기에 대고 대답했냐?
-별로 놀랍진 않네. 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녹음기는 네 마음대로 써.
-네가 이상한데 쓰리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뒷 내용부터는 아예 새카맣게 칠해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새 편지지에 쓰지 그랬어. 오지로는 쓰게 웃었다.
편지에 왜이렇게 지워진 부분이 많은지 편지의 작성 날짜를 보고 짐작했다. 우리가 싸운 날이었지. 성격차이로 인한 자잘한 다툼은 평소에도 여러번 있었지만 그 날만은 유독 크게 싸웠더랬다. 싸움의 시작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기억하는 건,
"내가 하는 말이 듣기 싫으면 세뇌라도 걸어서 입닥치게 만들지 그래?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아,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신소는 충격받은 표정이었음.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가 차마 하지 못하고 다물고.
거기서 사과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당장의 분노가 너무 컸음. 오지로는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신소는 집 밖으로 나가버렸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식힐 시간, 마음을 다스릴 시간, 할 말을 생각할 시간.
오지로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신소는 바깥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음. 오지로가 경찰로부터의 협력 요청 전화를 받는동안 신소는 녹음기와 편지지 하나를 샀음. 오지로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신소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오지로가 먼저 집을 나섰다. 신소는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신소는 조금 안심했고, 조금 실망했다. 이것저것 녹음했다. 편지에도 이것저것 썼다. 여러 번 수정하느라 종이가 망가져서 아예 새로 썼다.
오지로의 귀가가 생각보다 늦어진 덕에 신소는 녹음기에 녹음했던 말들을 여러 번 덮어 씌우고 다시 녹음할 수 있었음. 오지로의 일이 끝나갈 무렵 신소에겐 다른 지부에서의 협력 요청이 들어왔고, 신소는 책상과 서랍에 녹음기와 편지지를 넣어두곤 집을 나섬.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도 시간이 엇갈려 오지로와는 만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오지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가야 했음. 병원에 가는 동안은 제발 무사해 달라고 빌었고, 병원에 도착해선 살아만 달라고 빌었으나 결국 어느쪽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후 며칠간 오지로는 신소의 장례를 치르고, 서류를 정리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옴. 돌아와서 몇시간을 멍하게 앉아있다가 신소의 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녹음기를 발견하게 된다.
편지에 지워진 부분이 많은 건 신소역시 화가 덜 풀린 상태였기에 말을 여러 번 고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음. 그럴만 했다. 자신도 그 날 당시 신소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일하는 도중 여러 번 실수하지 않았던가?
혹시 신소도, 같은 이유로 한 순간 방심해 버린 건 아닐까?
무심코 떠올린 생각은 절망이 되어 오지로를 덮쳤다.
그 후 오지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살게 됨. 다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여러번 찾아왔지만 그래선 안됐다. '녹음기는 네 마음대로 써.' '네가 이상한데 쓰리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신소가 마지막까지 믿어준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은 히어로여야만 했음.
올곧은 성격이여서 그랬는지, 결국 사과하지 못한 말이 오지로의 발목을 붙잡았는지. 오지로는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무너졌음. 녹음기와 편지지는 항상 지니고 다녔음. 사용하는 일은 없었지만.
오지로는 마지막에, 배에 관통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죽어가던 차에 녹음기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됨. 무의식적으로 재생시켰는지, 아니면 어쩌다가 눌린 건지. 그래도 끄지 않고 천천히 들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근처에 편의점이 어디있는지 알아?"
"성함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아무 대답이나 좀 해봐"
"대답좀 해보라니까."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니 기억보다 부루퉁한 음성이어서 오지로는 피식 웃음. 이 때 쯤 내가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 뒤로도 몇가지 질문이 더 재생되곤 정적이 이어졌다. 이게 마지막 녹음인가? 정적은 좀 오래 이어짐. 정지 버튼을 누를 힘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한참 지난 후에 다시 목소리가 들림.
"오지로, 앞에서 대답했어?"
"짜증나 너."
"나한테 사과해 멍청아."
역시 그 날 화 덜풀렸구나. 오지로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음.
"서랍 두 번째 칸에 있는 편지를 꺼내와."
"......."
"책상 위에 까만펜 주워."
"사과해 멍청아. .....세번째 문장 지워."
"화내서 미안해. .....일곱번째 문장 지워."
"힘들면 쉬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 열 두 번째 문장 지워."
"무리하지 말고. .열 세 번째 문장 지워."
"행복하게 살아. 열 네 번째 문장 지워."
오지로는 멍하니 듣고있다가 신소가 남긴 편지에 새카맣게 지워진 부분이 많았다는 걸 기억해냄
주섬주섬 갖고있던 편지를 꺼내서 확인해보니 지우라고 명령돼있는 순서의 문장이 지워져 있었음. 신소가 쓰다가 화나서 지운 줄 알았는데, 세뇌에 걸린 자신이 지운 문장이었던 것임. 왜 굳이 저렇게 했지? 의아해하는 오지로를 두고 신소의 목소리가 이어짐.
"세뇌 걸고 명령한 거니까 잔말말고 따라."
"......됐다. 그냥 얼굴보고 할 걸 난 왜 이렇게...."
"혹시 모르니까."
"녹음기 끄고 벽에 머리나 박아."
오지로는 그제야 자신이 녹음기를 처음 발견했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를 이해했음. 녹음기에 대답했다가 세뇌에 걸리고, 힘들게 살지 말라고, 행복해 지라고 명령받고, 신소가 시킨대로 편지의 문장을 지웠었음.
너는 왜이렇게 변덕스럽고 세심한지. 평생 사과하지 못할 상처만 남긴 신소를 떠올리며 오지로는 점점 졸려지는 걸 느낌.
완전히 잠들기 직전에 "이제 버려도 돼." 라고, 녹음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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