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다리는 판단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였다. 오른손은 더 이상 감각이 없다. 왼손은 아예 어깨부터 움직이질 않는다. 반격하더라도 승산이 없음은 불 보듯 뻔했다. 절박한 심정과는 반대로, 리의 머리 한 구석에선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있었다. 어차피 가망이 없다면, 도망칠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게 나의 긍지 아닌가?
비틀, 한 순간 집중이 끊어지자 움직임이 무너졌다. 한계까지 달리던 반동에 리는 그대로 모래바닥을 뒹굴었다. 입 안으로 들어온 모래를 뱉고, 팔꿈치로 바닥을 짚어 겨우 몸을 일으키는 찰나의 순간에도 리는 투지를 불태웠다. 그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느껴졌다. 가이 선생님, 저는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정말? 그게 긍지라고? 그냥 살아남기를 포기한 것 아니라?
시야가 아득해지며 곧 몸이 튕겨져 날아올랐다.
*
<분류 - 호카게 직인 문서>
<최상위급 기밀 유지>
이름 : 록 리
성별 : 남자
나이 : 17세
닌자 등록번호 : 012561
기타 특이사항 : 임무 수행 중 본국 제출 예정이던 문서를 갖고 실종됨. 당국은 규정에 따라 록 리를 탈주 닌자로 판단. 록 리를 제거하고 기밀 문서를 회수한다.
*
부유하던 신체가 다시 한 번 모래바닥에 처박히자 온몸을 으스러뜨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리는 갈비뼈 한 대가 더 나갔음을 직감했다. 쿨럭. 피가 섞인 모래를 토해낸다. 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던가?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생각하자, 생각해야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무엇이 날 살게 하지?
문득 보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곳에 그들은 없어, 나는 만나러 가야만 해. 애써 시야를 다잡으며 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다행히도 아직 다리만은 부러지지 않은 것 같다.
죽지 않는다. 살아남을 거예요. 그게 나의 긍지니까.
*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불온한 기운에 가아라는 감각을 집중했다. 거대하고 빠른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기도 하며, 더욱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간격을 좁혀가고 있었다.
무엇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가아라는 제가 찾던 사람이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음을 확신하고 몸을 일으켰다.
*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냥.
자꾸만 약해지려는 정신을 붙잡는다.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리는 그 사실을 되새겨야만 했다. 왼쪽 어깨는 탈골됐다. 왼쪽 다리도 허벅지부터 길게 찢어져 피가 흐른다. 그나마 뼈가 다친 건 아니지만, 서둘러 지혈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
맞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죠.
몇 년 전 치러졌던 중급 닌자 선발전을 떠올렸다. 몸의 절반이 으스러지는 고통. 그럼에도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신을 놓치면서까지 매달렸다. 증명하고만 싶었으니까. 자신의 길이 그르지 않음을.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증명해야했다. 그리고 그건 틀리지 않았다. 리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그 때와 같을까요?
리는 오른팔을 겨우 움직여 품 안의 두루마리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숨을 고른다. 아직은, 안 돼.
등에 짊어진 무게가 다르다. 자신은 더 이상 그때처럼 단순할 수 없었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이 눈으로 스며들어 쓰라렸다. 시야가 붉어진 걸 보니 피도 섞였음을 짐작했다. 붉은 색, 모래.
급박한 와중에도 무심코 떠오르는 기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너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네 모래도 나를 뒤쫓을까요? 내가 모든 걸 놓고, 모든 걸 걸고, 너에게 신뢰를 맡겨도 될까요?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나요?
한 방울, 눈에 다시 땀이 스며든다. 쓰라려서 눈물이 났다.
*
사냥감을 갖고 놀던 포식자가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아라는 상대방이 자신의 차크라를 인식했음을 깨달았다. 다 잡은 먹이를 빼앗길까봐 분노하는 것이다. 어림없어. 가아라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냄새에 정신을 집중했다.
“가아라, 명령을.”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아라는 그것이 꼭 신중함 때문만은 아님을 알았다. 그의 누나는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우선시해야하는 것인가? 대답은 명료하다. 나뭇잎으로부터의 요청은 두루마리의 회수. 일개 중닌의 안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두루마리는 시체로부터도 회수할 수 있다. 가아라는 저 괴물이 이 이상 마을에 근접하기 전에 판단을 내려야 했다.
가아라는 리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환한 미소가 햇살에 지워진다.
차크라가 넘쳐흐른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어 흐른다. 거대한 불꽃이 지면 아래에서 그 몸집을 키워나간다. 가아라는 그것이 제 분노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넘쳐흐른다. 순식간에 솟구친 모래가 하늘을 뒤덮었다.
*
산소가 부족하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몸에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이 빠져나간다. 리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제 한계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둘씩 실이 끊어지는 몸은 점점 더 움직임을 흐트러뜨린다.
절박하게 뻗은 손이 무너져 내렸다. 리는 끝을 직감했다. 곧 머지않아 기력을 다한 몸이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이르게 시야가 주저앉았다.